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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우세영 알렉시오 (St. U Se Young Alexius)
  • 새남터
    2013.07.22 17:38:03
  • 성 우세영 알렉시오 초상
    우세영 알렉시오는 '세필'이라는 속명도 갖고 있는데,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대대로 선비를 지내오던 양반 집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도 당시의 사회 풍습대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벼슬을 위한 과거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재주가 아주 비범하여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알렉시오도 이런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노력을 많이 했다. 마침내 그가 16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길은 항상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이라, 바로 그렇게 갈망하던 과거 급제를 위해 시험을 보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요한을 만나게 되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돌아온 우세영이 벼슬길을 포기한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인 것이다. 

    그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긴 천주교 교리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믿고, 결국 벼슬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만약 그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면, 훗날 평범한 벼슬아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내버린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장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를 만나본 장 주교가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세례를 주지 않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세레를 주신다면 천주의 도우심을 받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기필코 이를 잘 참아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저버리지 마시고 제 소원대로 세례를 받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정 마르꼬 회장의 인도를 받아 1863년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가족의 천대가 대단하였고,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수난을 가만히 인내로써 이겨냈다.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대하기가 부끄럽다 하여 가족들은 그를 감금까지 하게 되었다. 

    이에 알렉시오는 어느 날 ‘집을 떠나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께 청하자, 그의 기도 덕분인지 아버지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어버린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일로 미루지를 말로 오늘이라도 좋으니 당장 떠나거라'하고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우 알렉시오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정 마르꼬 회장 집에 일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서울에서 1년이 지낸 뒤에 아버지가 알렉시오를 찾는 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고향으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는 알렉시오를 불러 성교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알렉시오의 집안이 성교를 배우기 시작하여 식구는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 20여 명이 한꺼번에 입교하였다. 이렇게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 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오는 정 마르꼬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가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내었으나, 두 번째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 하였다. 

    하지만 시련은 그때부터였다. 특히 굳세게 신앙을 고백하던 유 베드로에 분격한 평양 감사가 배교자들로 하여금 유 베드로를 매질하도록 하여 죽게 하니, 그 시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시체마저 배교자들이 메어 가 대동강에 던져버리라니, 알렉시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유 베드로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다. 그의 순교는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증거케 하였으니, 그가 곧 알렉시오였다. '우리는 우리의 입과 손으로 하느님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낯으로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땅을 밟을 수 있으며, 무슨 면목으로 하느님이 지어 주신 하늘을 쳐다 보고, 땅과 하늘 사이에 가려 있는 하느님의 물건을 감히 쓸수 있습니까?' 하며 통곡하던 알렉시오는 옥중에 있는 장 베르뇌 장 주교를 만나 지난 일들을 사죄받고 베르뇌 장 주교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심한 문초를 받으며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날까지 온갖 고문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지난번 배교했던 일만으로도 많을 고통을 체험했소, 이제는 나는 나의 스승이신 주교님과 함께 죽기만을 바랄 뿐이오'라며 오히려 군졸들을 나무랐다. 새남터에서 알렉시오의 목은 두 번, 세 번 내리치는 술 취한 희광이의 칼 끝아래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이니, 1847년 그가 태어난 지 20년 남짓 된 때이다. 

    그후 그의 시체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3일 후에 와고개에 안장되었다가 현재는 절두산순교기념성당에 모셔져 있다. 

    1984 년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에 의해 시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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