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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현석문 가롤로 (St. Hyeon Seok Mun Carolus)
  • 새남터
    2013.07.22 17:09:09
  • 성 현석문 가롤로 초상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병오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한 후에도 아직 8명의 증거자들이 감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김 신부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한결같이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정부는 급기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중 현석문 가롤로만은 소위 사학의 괴수라 하여 김신부처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처형하였고 나머지 7명은 옥에서 목을 옭아매어 죽이게 하였다. 현석문 가롤로는 1796년에 대대로 벼슬을 지내던 서울 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현계흠 베드로가 1801년 신유년에 순교한 이래 어머니와 누이와 한가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전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도와주는데 바쳤으며 교황청 조서는 그에 대하여, “공적이 많고 덕이 높으며 성격이 상냥하고 온화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문모 신부 순교 후, 이 나라에 주교나 신부가 아직 한 분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현석문은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 당시 쟁쟁한 인물들과 늘 교회를 상의하였고 무엇보다도 선교사를 모셔오는 일과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중대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현석문은 위험한 국경지대를 여러번 드나들면서 김대건, 최양업 등 신학생을 외국으로 떠나 보내는 한편 국경에서 대기 중이던 주교, 신부를 영접하게 되었다. 기해년 박해 때 현석문 가롤로 회장은 샤스탕(정)신부에게 복사하고 있었는데 석문은 주교 신부를 따라 포도청에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이 그것을 말리고 차라리 남아서 목자 없는 교회와 교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깊이 숨고 세밀한 주의를 하여 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앵베르(范)주교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선 교회를 현석문에게 맡겼다. 주교가 그를 얼마나 중히 여겼으며, 교들에게 얼마나 두터운 신앙을 받았는지 이 한 가지 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다. 또 앵베르 주교는 전교회장 현석문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그대는 살아서 순교자의 행적을 만들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 여기서 순교한 교우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기해일기다. 이것은 앵베르 주교 자신이 기해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이의 교회사정과 순교자의 간단한 전기를 만들게 되었으나, 주교 자신이 멀지않아 잡히게 될 것을 생각하고 그 뜻 깊은 일을 서울 교우의 회장이던 현석문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이후 3년 간 현석문은 포졸에게 쫓기며 변명과 변장을 해 가면서 깊은 산중의 극빈한 교우의 오막살이집에서 나날을 보내야 하는 등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렇게 막다른 처지에 있으면서도 현석문은 지방을 두루 다니며 애긍을 거두어 옥중 교우들의 사식(私食)을 돌보고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안전한 곳에 이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신입 교우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포졸들이 수색을 당할 염려가 가장 적은 동네로 모이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면서 맡은 바 직책을 성의껏 수행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을 수집하라는 주교의 분부를 잊지 않고 스스로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고 그간 최 필립보, 정하상 등이 수집한 것을 다시 조사하여 책으로 정리하여 모든 교우들로 하여금 두루 읽게 하였다. 이것이 순교자소전(殉敎者小傳)인 <기해일기>라는 것이며 이 귀중한 순교자의 자료를 오늘날까지 전하게 하였다. 현석문이 지방으로 피신하여 다니는 동안 서울에서는 식구들이 다들 잡혀 순교하였다. 먼저 누이 현경련 베네딕타가 참수 치명한 데 이어 김 데레사와 은석 처자가 옥사하였다. 홀로 남은 현석문 가롤로는 박해 후 경향각지(京鄕各地)를 두루 다니며 교우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냉담자를 찾아 다시 수계할 것을 권면하여 마지않았다. 무엇보다도 석문에게는 목자 없는 교회에 선교사를 맞아 들여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국경과 북경에 사자를 파견하여 그간 두절되었던 중국 교회와의 통신을 부활시킴으로써 마침내 김대건 부제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들우물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나서 상해로 건너가 주교 신부를 영접하여 온 후 실제로 신부댁 주인노릇을 하며 교중일을 맡아보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의 체포소식을 전해들은 현석문 회장은 즉시 김신부를 어느 비신자에게 맡기고 그 집에 있던 교회의 돈과 물건을 옮기고 동시에 여교우들을 가마에 태워서 이 아가타 집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자기는 사포서동에 새 집을 마련하고 그 곳에 숨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가마를 매고 간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 아가타의 집에 남아있던 우 수산나를 앞장세워 현석문 회장의 새 집을 습격함으로써 현회장을 비롯 5명을 모두 체포하여 우 포도청에 가두었다. 때는 7월 10일 이었다. 포도청에서 우 수산나가 집을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여교우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현석문 회장이 이 광경을 보고, “천주를 위하여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라고 타일어 여교우들을 화해시켰고 마침내 모두가 훌륭하게 순교하게 되었다. 현석문은 포청에서 7월 23일과 26일 양일 사이에 여섯 번의 문초를 받았다. 첫 번 문초에서 석문은 “제 자호(字號)는 덕승(德昇) 나이 겨우 다섯 살에 아버지([계흠(啓欽)]가 신유년 사학(邪學)에 복법(伏法)이 되었고, 어머니가 자를 데리고 동래로 가서 살다가, 열네살에 서울로 올라와 약국을 업으로 살았더니, 기해년 사옥(邪獄)에 저의 성명이 모든 초사(招辭)에 나오는 고로 이재영이라고 성명을 고치고, 호서와 호남으로 도망하며 살다가 재작년에 서울로 올라와, 사포서동 김소사집에 숨었다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하고 그 간의 피신한 경위를 자백하였다.


    그 다음 문초에서 석문은 김대건을 유학 보냈고 또한 귀국할 때에 그를 인도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피신한 사실 등도 아울러 자백하였다. 1846년 9월 19일 정부는 석문을 모반 죄인으로서 군문효수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선고문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반한 법률로 시행할 것이나 저같이 더럽고 작은 자를 왕부(王府)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없으니 대건의 예에 의하여 군문을 내어주어 머리를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칠 것이다“ 하였다. 그 날 석문을 사장(沙場)에서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잘라 매달아 민중을 깨우쳤다고 보고해 왔다. 이 때 석문의 나이 50세였다. 후에 교우들이 현석문 회장의 시체를 찾아내어 왕십리에 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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