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

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님 (St. Rev. Bretenieres Justus)
  • 새남터
    2013.07.22 17:05:04
  • 성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 신부 초상

    1866년 3월 7일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행렬에서 수고와 고통으로 인해서인지 나이보다 오히려 노인처럼 보이는 주교 뒤에는 키가 크고 곱슬곱슬한 엷은 밤색 머리에 얼굴이 부드럽고 명랑한 젊은 선교사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28세밖에 되지 않은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 Ranfer de Bretenieres, 유스토) 신부였다. 그의 한국성은 백(白)씨였다. 유스토 마리 드 브르트니에르는 1838년 2 월 28일 프랑스 귀족가문인 샬롱(Chalon sur Saone)의 노 판사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그 부인 안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두 사람 모두 신앙이 깊고 열심할 뿐 아니라 자선사업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신심 깊은 이 부부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참 신앙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고 늘 염려하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어떤 특정한 가정교사에 의뢰하지 않고 항상 자기들이 손수 돌보아 주었다. 이런 사실은 아버지가 그의 협조자인 고트렐레 수도원장한테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에 앞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내 자식들이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실로 이것은 자녀들한테 바라는 오직 한 가지 나의 포부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토록 열심한 부모는 어린 두 아들의 신심생활을 단련시키는데 못지 않게 체질적으로나 성격 면에서도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썼다. 따라서 이들의 생활규범도 유별나게 엄격했다. 방학 때엔 가끔 산에 가서 같이 지냈으며 자주 함께 여행하여 자녀들에게 언어공부와 지리공부를 시켰다.


    그러다가 1864년 청년이 다 된 유스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하던 외국 선교사가 되어 자신을 천주님께 봉헌할 뜻을 외할아버지한테 여쭙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그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날 성 니콜라 학교의 한 소년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유토스는 문득 자기가 왜 늘 선교사가 될 생각을 해왔는지 이제야 깨달았다고 하면서‘내가 성소를 내 마음 속에 느낀 것은 무척 어려서부터 였다. 내가 세 살 때의 일이었는데 다른 것은 내가 미처 못 알아들었지만 나는 키 작은 중국 사람들을 회개시키러 간다는 것만은 항상 기억해 왔다’고 말했다.”


    브르트니에르 두 형제 (동생은 프란치스코 드 살)가 서로 만나 이야기할 때에도 유스토는 동생에게 “나는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늘 말하곤 하였다. “나는 순교자가 되고 싶어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원하니까요.” 이 놀라운 말은 소년 유스토가 휴롤 수도원장한테 드린 말이다. 한마디로 유스토는 어려서나 커서나 한결같이 선교사가 되는 희망으로 차 있었다. 1857년 유스토가 고등학교 공부를 할 때의 일이었다. 유스토는 정식으로 플라비니(Flavigny)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들어가 수련생활을 하겠다고 승낙을 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2 년을 더 기다리기로 하고 이동안 그는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동생의 공부를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2 년이 지나자 유스토는 마음 속에 자기 결심을 굳힌 다음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1859년 파리에 있는 이시(Issy) 신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유스토는 모든 이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아가며 지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1860년 삭발례를 받은 유스토는 다음해 그의 친구에게,“나는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갈 생각이다.”라고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외방전교회의 장상을 찾아가 상의한 후 부모에게 자기 결심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기어이 승낙까지 받아낸 유스토는 1861년 7월 25일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한 동료는 유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스토의 마음은 참으로 비범하였다. 천주님께서 그에게 순교의 특은을 허락하시지 않더라도 그는 꼭 언젠가는 성인품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신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동료 볼리외, 도리와 같이 1864년 5월 21일 티베 교구장 토미느 데마쥐로(Tfomine-Desmazures) 주교에 의해 신품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첫 미사를 지낼 때부터 천주님께 특은을 주시기를 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순교자들의 수고와 고통을 같이 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영광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6월 13일 그는 자기가 어떤 전교지방에 배속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덕행을 알고 있던 교장은 거기에 대한 새 증언을 얻고 싶어서 그에게 말했다.
    “오늘 목적지를 알려 주는 날입니다. 어떤 전교지방을 더 좋아합니까?”
    유스토는 더 좋아하는 데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똑같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거룩한 노인인 앙부랑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티벳으로 가시오. 좋소?”
    “아주 만족합니다.”
    “아니오. 티벳으로 가지 않고 통킹으로 가게 되오.”
    “그것도 역시 좋습니다.”
    “그럼 포교지 지나로 가시오.”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단 말이요?”
    “그렇습니다. 신부님.”
    “자 이제는 진지하게 말하겠소.”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서 있는 교장신부 앞에 무릎을 꿇으니 교장신부는,
    “당신은 조선으로 가시오”하고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스토는 조용히 대답했다.
    “신부님께서 저더러 고르라고 하셨어도 다른 데는 고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발하는 다른 세 젊은이 볼리외, 위앵, 되리 신부들도 같은 목적지로 배정받았다. 도리 신부는유스토와 같이 따난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좋아서 이 점만을 기억해 두고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동료들이, 아니 대관절 어디로 가는데 그래?“하고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몰라, 내가 아는 것은 유스토하고 같이 간다는 것 뿐이야.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 뿐이야.”


    파리 출발은 7월 15일로 정해졌다. 서둘러 출발 준비를 하는데 유스토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을 뿌리칠 힘과 끝까지 잃지 않는 평온을 기도에서 얻어냈다. 마지막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신학교의 문을 넘어서려는 순간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호주머니에 아직 동전 다섯 닢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도리 신부에게 주면서 말했다.


    “참 좋다! 내가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20년이 더 되었는데 이제 정말 가난하게 됐어.”


    홍콩에서 조선으로 향해 가기로 되어있는데, 네 사람의 출발자는 그들의 나머지 여정에 대해 상세한 지시를 받았다. 즉 해상에서 여섯 달 동안을 지내는 대신 만주의 배롤 주교에게로 가라는 것이었는데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시기가 올 때까지 거시서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조선에 잠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주에서 새 선교사들을 싣고 오는 배와 또 하나는 그들을 반도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조선에서 보낸 배가 조선 서쪽에 있는 매린도(백령도)에서 만나는 것임을 베르뇌 주교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1864년 10월 28일 만주해안의 요하 어귀에 도착해서 조선에 들어갈 유리한 조건을 여섯 달 동안을 기다려야 했다. 이 여섯 달 동안 그들은 중국말 공부와 중국 뱃사공들과 복잡한 교섭을 하는데 보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협약이 맺어졌다. 뱃사공들은 5월 2일 만주를 떠나 네 선교사를 매린도까지 데려가서 필요하다면 마지막 기한인 5월 20일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우들이 배 한 척을 보내기로 되었는데 그 배는 5월 10일과 20일 사이에 백령도 앞 바다에 나타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 번 조선 배는 도중에 발각되어 압수되었고 두 번째 배는 정해진 기한이 마지막 날 밤 자정에야 겨우 나타났다.


    풍랑과 조선 병졸들의 경계와 식량의 부족으로 인해 시련을 겪은 젊은 선교사들은 약속 장소에 제때에 닿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과 기약 없이 만주로 돌아가야 할 필요 때문에 한층 더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5월 20일 토요일 자정과 한시 사이에 배 한 척이 베르뇌 주교의 이름을 말하는 선원들을 태우고 그들의 배에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이제 살아났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빨리 서둘러서 배를 옮겨 타고, 짐을 옮겨 싣고 백령도를 빠져나기가 시작했다.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해도 연안으로 입국이 위험했기 때문에 거기서 300리나 떨어진 남쪽으로 갔다. 어둠을 타서 위험을 벗어났다. 그러나 조선배는 시설이 형편없는 돛이며, 밧줄이며, 갑판까지도 짚으로 짜서 만든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배에서 크게 곤궁을 맛보았다. 깊이 2미터, 너비 1미터의 비좁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1주일 내내 다리를 오그리고 옆으로 누워 거적을 덮고 지내야 했는데 이 거적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는 해주었으나 비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식량은 줄어들었고 오래지 앉아 뱃틈으로 스며드는 바닷물로 배가 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해는 계속되었다. 중국인과 연락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두 척이 당한 엄혹한 운명에 겁을 집어먹은 선원들은 그들의 밀수품을 싣고 서울 지방에 접근하기를 거절하고 그보다 300리나 더 남쪽에 있는 그들의 출신 지방인 내포지방에 가서 배를 댔다. 1865년 5월 27일 저녁 여섯시에 브르트니에를 신부와 동료들은 조선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교우들은 친절과 놀라움과 공포가 섞인 감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교우들은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고자 오는 신부들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의 조선입국에 가담한 자들이 당하는 사형이 두려웠다. 선교사들을 데리고 온 배 주인조차도 감히 그들을 돌보려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는 계약을 이행했고 따라서 책임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베르뇌 주교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서울에 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천주님의 섭리가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집이 불에 타버린 다블뤼 주교는 피난처를 찾아 내포지방에 와서 선교사들이 상륙했던 동네에서 20십리 되는 곳에 있었다. 다블뤼 주교는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안전하지 못한 그 곳에서 빠져 나오게 했다. 5월 28일 다불뤼 주교는 한 교우를 시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서울로 인도하게 하고 자신은 그가 거쳐하던 거더리(합덕)교우촌으로 다른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다. 베르뇌 주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고 그를 그냥 서울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주교는 남대문 밖 자암에 있는 회장 정의배 마르코의 집에 그의 거처를 정해 주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오랫동안 살았던 9평방 미터 되는 좁은 방에 들었다. 그 방이 그의 사무실 겸 경당 노릇을 했다. 거기서 1866년 2월까지 살면서 시간을 나누어 말도 배우고 기도도 드리고 했는데, 다만 세례와 견진을 주는 일과 밤에 주교를 찾아뵙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참된 피정의 생활을 거기서 했다.


    <이런 종류의 생활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 주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찾아가는 순교가 피의 순교인 때는 드물겠지만, 언제나 좋건 싫건 즉 공로가 있건 없건 자기의 모든 경향과 자기의 취미와 뜻을 버리는 순교일 것이며 대단히 심한 육체적 고행 외에 그보다 더 많은 정신과 마음의 고행이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은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거의 완전한 은둔상태에서 풍토순화와 적응과 말공부라는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을 때 쓴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훌륭한 사도 베로뇌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실질적인 사도직을 시작했다. 그가 80명 가량의 고백을 듣고 어른 40명에게 세례를 주고 몇 번 견지성사를 주고 여러번 병자의 성사를 주었는데 1866년 2월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가 혼배성사를 집전하고 견진성사를 주고 있을 때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소식을 다블뤼 주교와 거주지를 아는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2월 24일 하루는 조용히 지나갔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미사성제를 드렸다. 그것이 마지막 미사가 되었다. 25일 그가 살던 집주인 정의배가 붙잡혔고, 그는 그 날 하루 낮 하루 밤을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26일 이번에는 그가 붙잡혔다. 그는 포졸들에게, “당신이 올줄 알았소”라고만 했다. 결박은 당하지 않고 그저 옷소매만 붙들린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신문을 당하자 그는 똑똑히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조선에 왔소. 나는 천주를 위해 기꺼이 죽겠소.” 그리고 조선말로 완전히 알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포청에서 하루 낮 밤을 지낸 뒤 금부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신문을 당하지 않고 고문만 당했는데 형벌을 한 마디 말도 없이 견디었다. 그는 주교와 운명을 같이해서 3월 6일 주교와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튼날 앞서 이미 서술한 절차에 따라 형장으로 끌려갔다. 브르트니에를 신부는 형장에 갔을 때, 목이 몹시 말랐다. 그래서 포졸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했으나, 이들은 알아듣지 못했거나 혹은 못들은 체했다. 그것을 목격한 증인 박 베드로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물 한 바가지를 떠 와서 형벌 받는 사람에게 갖다 주게 하라고 관리에게 청했다. 집행관은 한 병졸에게 갖다 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병졸은 분개해서 물을 땅에 쏟아 버리며 말했다.


    “금방 죽을 죄인들에게 먹을 물을 줘서 뭘 합니까?” 그러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밧줄을 움켜잡아 씹었다. 그러니까 침이 약간 생겨서 그것을 한숨을 쉬며 삼켰다. 구경꾼 하나가, “너희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않던 네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죽으니 후회가 되지 않느냐?”하고 외치자,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신부는 대답했다. 그리고 “좋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팔방돌이를 하는 동안 신부의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병졸에게 바지를 추겨 주라고 명했다.


    베르뇌 주교와 몇 마디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어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차례가 되어 네 번짼가 다섯 번째로 칼에 그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이들 순교자들의 머리는 그 곳에 사흘 간 매달려 군중들에게 현시되었다가 후에 교우들이 정성껏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연관 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