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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님 (St. Chastan Jacobus)
  • 새남터
    2013.07.22 17:00:37
  • 성 야고보 샤스탕 신부 초상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는 프랑스인 선교사로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이며 새남터에서 순교하시고 성인품에 오르셨다.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으며 그의 청이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양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지금의 양평)에 가 있던 모방 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 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복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백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한양으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그의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자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 한양으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신부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한양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으며 회장 한 사람을 부산에 내려보내 일본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당쟁의 여파까지 가세하여 관헌에서는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과 새남터 성당 소성당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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