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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모방 나베드로 신부님 (St. Maubant Petrus)
  • 새남터
    2013.07.22 16:53:54
  • 성 베르뇌 모방 신부 초상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는 서양인 선교사로서는 한국에 최초로 들어오신 분이며,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이라고 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1984년 5월 6일 성인위에 올랐다.


    한국명이 나 백다록이라는 것은, 성은 나씨에 본명인 베드로를 한문으로 표기하여 백다록으로 사용한 것이다. 1804년 8월 23일, 프랑스 배시(Vassy)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열성적이 면과 부지런함이 뛰어났다. 그리고 항상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러한 전교의 의지는 결국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그는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3년 뒤에 중국 사천성 포교지에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조선의 상황을 듣고는 곧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835년 11월 소 주교가 입국도 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장례를 맞게되었는데 그곳에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와 있던 조선신자 다섯 명을 만나 조선입국을 계획하였다. 다행히 그의 얼굴 모습이 조선인을 닮아 1836년 1월 12일 밤중에 의주의 남북 두성을 통하여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서양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에 첫 발을 딛었던 것이다. 그가 입국을 하는데 얼마나 큰 고역을 치렀는지를 그의 편지에서 보면 '나는 여권을 조사하는 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벌벌 떨었다. 이로부터 밤과 낮을 굶으면서 달리어 백리길을 걸었다. 변문으로부터 조선의 검문소에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사람이 없고 황무지로 되어 있어서 호랑이와 이리떼만이 돌아다니는 언덕과 골짜기가 가로 놓여 있었다. ... 나는 머리에 상투를 틀어 얹고 얼굴에는 누렁 칠을 하고 병들어 앓는 사람 모양으로 모래 위에 넘어져서 끙끙대고 앓은 소리는 내었다. ...'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였으나 교우들의 요청으로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16개 내지 17개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영세를 주고 6백여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도록 하며, 모임에서는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성가와 성인전기 등을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목활동 중 특기해야 할 것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다. 그는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츠시꼬 사베리오, 김대건 안드레아 세 소년을 가리어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였다. 1839년 12월 2일에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니 이들이 조선 500년 역사를 통하여 해외로 파견된 최초의 유학생들이 되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선각자가 되었다.


    1837년 1월 15일에 샤스땅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양평으로 내려와 열심히 조선말을 배워 본격적인 전교를 했으나 1837년 7월 중순에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열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샤스땅 신부에 의해 병자성사를 받게 되었는데, 모방 신부는 샤스땅 신부가 성체를 모시고 방의 문지방을 넘어 설 때 병이 다 나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과연 병이 다 나아서 3개월 후에는 다시 일할 수 있었다.


    이 두 신부가 1837년 한해에 1,237명에게 세례성사와 2,078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으며 1,950명에게 성체를 모시는 즐거움을 주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신자들이 신자마을을 만들어 살게 하고 어린이 세례, 혼인, 장례, 주일과 축일의 모임, 말썽거리 해결 등에 관한 지침을 정하여 주었으니 혼자서 자라 온 조선교회가 일정한 조직과 법칙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앵베르 주교, 샤스땅 신부와 함께 무수한 고문을 당한 다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그가 자수하지 전에 남긴 편지 한 토막을 소개한다.


    '... 많은 장애를 뚫고 우리를 이 포교지까지 인도하여 주신 천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던 평화가 가혹한 박해로 혼란된 것을 하락하셨습니다. ... 오늘 9월 6일 우리에게 순교하러 나오라는 주교님의 두번째 명령이 왔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나서 떠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나에게는 영광으로 가는 길이 하나 뿐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원하노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맛이 달고, 쉬기 좋은 그늘을 주며, 승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하느님의 인자에 천만 번 감사드려주시며, 우리 가엾은 신앙인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839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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