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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님 (St. Berneux Simeon)
  • 새남터
    2013.07.22 16:52:43
  • 성 시메온 베르뇌 주교 초상

    베르뇌(Berneux, Francois, 한국명 : 張敬一)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주교로 1866년 3월 7일 병인대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성인은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망스(Mans) 교구에서 평범한 부모한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간 일을 했는데, 혁명이 일어나자 신앙생활을 멀리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그는 10세가 되었을 때, 사제가 될 것을 결심하고 부모의 승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의 후원으로 라틴어를 공부한 다음, 그 도시에 있는 학교에 편입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몇몇 정성어린 도움으로 '망스'에서 면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소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연수했다. 1831년 그는 망스 대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때 건강 때문에 휴학했으나 다시 학업을 계속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사도성직에 대한 강한 매력에 이끌려서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고, 1839년 7월 15일에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그 해 11월 28일에 선교지 출발 명령을 받고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1월 15일 파리를 떠나 그 해 6월 25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 후 1841년 그들은 조그만 돛단배를 구해 타고 중국 통킹으로 가다가 도중에 베트남에 가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그곳이 박해 중이라서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잡힌 지 넉달 만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특별한 요청으로 결국 1843년 3월경에 석방되었다. 같은 달 17일 선교사들은 다시 상선을 구해 타고 이곳 저곳 헤매다가 1843년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성인은 그 해 10월경에 만주 주교로 임명되어 10여 년 간 열심히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지혜롭게 교구를 이끌어갔다. 1845년 8월 5일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조선 교구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한국 입국을 명령하였다. 수 많은 곤경이 가로 놓여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 소임에 만족하면서 '조선은 훌륭한 순교자의 나라이다. 조선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 선교사를 마음속에 희열이 넘쳐 뛰는 곳인데 어쩌 입국을 마다 하리오'하며 푸르티에 신부와 숨어살면서 입국을 꾀하던 끝에 1856년 다행히 조선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만에 한양에 입성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하루 2시간만 자고 경기도에 산재해 있었던 60여개의 공소를 상복을 입고 방문하였으며 '매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산길을 걸어서 4,5리를 가야 하고, 어떤 때에는 해면처럼 물을 빨아 들이는 버선과 짚신 차림으로 비와 눈을 무릅쓰고 길을 가야 합니다 '하는 글을 남겼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교회 최초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 안 신부에게 부주교의 성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직자 회의 결과 그는 1857년 8월 <장 주교 제우윤시서>를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정비하였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 서적이나 출판을 대량 저술. 정리, 출판하였다.


    1864년, 철종이 승하하고 12세의 고종이 등극하면서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무력적인 통상요구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1866년 초에 병인 대박해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학살되기 시작했다.


    1866년 2월 23일 포졸들이 장 주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장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심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놓고 형벌을 받을 때 요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군졸들이 곤장을 들고 매질을 가했는데 곤장을 맞을 때,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80명의 군졸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때를 같이 하여 도리 김 신부와 볼리외 서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백 신부도 체포되어 같은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참수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신부와 함께 서로 머리를 맞대로 묶인 채 끌려나와 형장으로 향하였다.


    장 주교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 흘렸다. 사형장은 길게 구비진 한강의 넒은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명의 군졸들은 천막을 쳐 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귀에 화살이 꽂혀지고 얼굴에 물을 뿌린 다음, 회를 뿌리고 겨드랑이 밑에 뭉둥이를 끼어 치켜들고 사형장을 한 바뀌 돌았다.


    마침내 선고문이 낭독되고, 칼을 든 병졸들이 날뛰고 소리를 외치며 돌다가 장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장 주교의 목이 두번째로 내려 진 칼날에 딸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당시 증인들에 의하면, 처형되는 순간 얼굴에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는데, 이 미소는 숨을 거둘 때가지 계속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한강로 3 가의 왜고개에서 정성껏 장례를 지냈다. 구 후 1899년 10 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었다가, 명동 대성당과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순교 직전 베르뇌 주교는 옥문 앞에 몰려들어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웃고 놀리지 마시오. 당신들은 오히려 울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당신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마련해 주려고 왔었는데, 이제는 누가 천국의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겠소. 정말로 당신들은 불쌍하오 “


    1968 년 10 월 6 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 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 년 5 월 6 일 교황 요한 바오로2 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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