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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님 (St. Imbert Laurentius)
  • 새남터
    2013.07.22 16:51:44
  • 성 라우렌시오 엥베르 주교 초상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한국명 : 범세형(范世亨)] 주교는 1796년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 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가난하였지만 총명할 뿐 아니라 기도와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러 갈 결심을 굳게 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액시(Axi)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 리하여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신품을 받고 곧 중국의 사천성 포교지에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난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을 사천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그는 포교를 행하고 중국의 언어와 관습을 익혀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또한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파견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1836년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 이어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그를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곧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을 횡단한 후 1837년 12월 16일에 봉황성의 변문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북경으로 가던 사절단에 다섯명의 신자가 있었고, 그 중 조신철 가롤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의 협력을 얻어 12월 17일 밤에 조선신자와 함께 변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의주 관문을 숨어 넘어서 13일 후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 창설 53년 만에 처음으로 주교를 맞게 되었다(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3개월 동안 조선 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신도들의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조선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라 주교를 맞이하여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신자의 수는 날로 늘어 갔고, 반면 앵베르 주교의 고생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몹시 지쳤고 크나큰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납니다. 세시에는 집안 사람들을 불러 기도 드리고 세시 반에는 예비자가 있는 경우 성사를 주고, 혹은 견진을 주는 것으로 성무의 집행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미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가 따릅니다. 해 뜨기 전까지 성사를 받는 신자가 20여명이고 ...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두시 반에 일어난 다음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영양가치도 별로 없는 맛 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끝맺어 줄 칼질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


    이때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정 신부와 함께 그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고 그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가 9,000명이 넘었으며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어른으로서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었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전교하고 있음도 알려졌다. 엥베르 주교는 배교자 김여상의 간계로 체포되었고, 다른 두 신부는 범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였다. 이것은 신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 넣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에서였다. 군문효수 언도를 받은 세 선교사들은 1839년 9월 21일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작은 가마를 타고 무장한 일백명 가량의 군사에게 호송되어 새남터 형장으로 나갔다.


    병정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그들의 손을 가슴 앞으로 결박짓고 겨드랑이 밑에 긴 몽둥이를 끼우고 양쪽 귀를 화살 두개로 내려 꿰뚫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회를 한 줌 뿌렸다. 그리고 병정 여섯명이 몽둥이를 메고 형장 둘레로 세 바퀴 끌고 다녀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받게 하였다. 그런 다음 한 병정이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한 병정이 사형 선고문과 선고 이유를 모두 읽고 나니 대장이 명하여 수형자들을 무릎 꿀린 후 곧 열명 가량의 병정이 그들 옆으로 달려들어 각기 지나는 길에 칼로 쳤다. 이때가 1839년 9월 21일 이었으며 성인의 나이 43세 때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목자를 불과 3년만에 다시 잃었고 1946년 김대건 신부가 들어오기까지 성직자 없는 교회가 이어졌다. 앵베르 주교는 당시의 신도들에 관한 전기를 모으다가 한양교우회장 현석문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1958년 파리에서 간행된 《기해일기》이다.


    성인은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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