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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순교자들
  •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 (Ju Mun Mo Jacobus)
  • 새남터
    2013.07.22 16:51:08
  • 주문모 신부님 초상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로 1752 년 중국 강소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 천주교에 입교하여 북경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794년 북경주교 구베아의 명을 받고 한국 잠입을 결행하여 12월 23일 조선인 신자 지황과 윤유일 등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 1795년 6월초 한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으므로 수 차례에 걸쳐 사제를 보내 달라고 중국교회에 요청하였고,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조선 신자들과 약속한 대로 1791년 봄 마카오교구 소속의 레메디오스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보냈지만 약속 날짜가 맞지 않아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바로 그 해에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였고 이듬해 권일신이 유배 도중에 사망하면서 조선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1790년 구베아 주교가 내린 제사 금지령은 몇몇 양반층 신자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조선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한 것은 1793년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던 윤유일과 최창현, 최인길, 지황, 그리고 여교우 강완숙이 지황과 백(白)요한을 북경으로 파견한 것이다.


    지황은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1794년 초에 귀국하면서 다시 한번 성직자 파견 약속을 받았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선발한 사람이 바로 북경 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그는 조선의 밀사들과 약속한 대로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요동의 봉황성 책문(柵門, 국경 관문)으로 가서 조선 신자들을 만났지만 압록강이 얼고 연행사가 다시 북경에 갈 때를 기다려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최인길은 한양 정동에 장차 신부가 거처하게 될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1794년 12월 14일(양력 1795년 1월 4일), 주문모 신부는 마침내 지황, 윤유일 등의 안내를 받아 한양에 도착한 뒤 줄곧 이 집에서 머무르며 우리말을 배웠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6일(양력 4월 5일) 여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활절 미사가 거행됨으로써 이 집이 조선 포교지의 유일한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거처가 포도청에 알려졌고, 5월 11일에는 체포령과 함께 포졸들이 정동으로 파견되었다.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주 신부는 남대문 안에 있던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지만 집주인 최인길이 체포되고 이어 윤유일, 지황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포도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주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어 일을 빨리 매듭지으려고 무서운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1795년 5월 12일 이들 세 명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고 말았다.


    훗날 밀사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선교사의 안내자들인 지황, 윤유일, 최인길 세 교우는 체포된 바로 그날 밤에 법정으로 인도되어, 재판관들의 악의와 술책과 잔인성을, 침묵과 인내와 항구함으로 이겨냄으로써 재판관들을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참된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 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재판관들은 세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와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외국인의 입국에 대해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절망하고 격분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증거자들은 거의 같은 시각에 고문 가운데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이름을 불렀으며, 얼굴에는 예수와 교회를 위한 고통에서 맛보는 영적인 기쁨의 평온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후 그는 6년 동안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정약종,황사영 등 특출한 교우를 만났고, 왕실의 은언군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 등을 입교시켜 세례를 베풀었으며, 충청도를 거쳐 전주까지 지방 전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수색망은 날로 좁혀지고 수많은 신자들이 잇달아 순교하자, 자신 때문에 무구한 생명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1801년 3월 자수, 그해 5월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이것이 조선교회 4대 박해의 첫 번째 박해인 신유박해 때의 일이었다. 이때 신부님의 최후를 지켜 본 신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히고, 형장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 억수 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는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 황사영 백서, 81행 -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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